1. (서문) 개정판 서문을 보면, 유진 피터슨이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를 저술한 이유가 미국 방식의 삶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예레미야를 통해 보여주려는 의도를 설명합니다. 소비상품과 같이 여겨지는 복음, 우리의 필요, 미국식 행복추구..., 이러한 유진 피터슨의 지적은 지금 한국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요?

  2. (1장) 유진 피터슨은 어떤 믿음의 이야기라도 각 사람 특유의 독창적인 이야기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최상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에 의거한 삶임을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말들과 함께 달려가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나요? 아니면, "스스로를 최소한으로 정의하여, 그 한도 내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에 머물러 계신가요 ?

  3. (2장) 예레미야의 이름은 여호와가 높이신다, 여호와가 내던지신다 라는 뜻으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투창과 같은 대변인이 되는 것을 내다보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이름은 현재 뿐 아니라, 장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모습을 내다봅니다. 개인의 이름은 '할당된 역할이 아니라, 우리의 신분 증명서'이며, 우리가 계속 나아갈 방향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의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요? 만약 새롭게 세례명을 정한다면 어떤 이름을 짓길 원하시나요?

  4. (3장) 예레미야서를 통해 우리가 미처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 우리가 알려진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내 스스로에 대해 품게 된 생각 이전에, 이마 하나님이 내게 품으신 생각이 있으며,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 모든 것이 본질상 하나의 응답이라고 말합니다. 성도 saint 는 행위,자질,도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받아 살도록 되어 있는 인생의 종류, 곧 전장에서의 삶이고, 누구 편에 서있는지 보여주는 표시이고, 성별되었다는 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단어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성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

  5. (4장) 스스로를 어린아이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는 '너를 난공불락의 성, 강철 기둥, 견고한 철벽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주와 함께 달려가는 탁월성이 구현된 예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부적격자라고 거절했던 경험, 또는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이뤄낸 경험이 있다면 나눠 주세요.

  6. (5장) 므낫세의 통치 기간처럼 “사회전체가 슬럼”이라는 상황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는 거짓이 팽배하고 악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 놓이기도 합니다. 요시아의 개혁을 보며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마음과 행동을 보여주었는지요? 예레미야처럼 평생을 두고 꾸준히 추구하는 자세, 가치, 행동방식이 있으신지요?

7, (6장) 유진 피터슨은 상상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상상은 믿음의 삶을 북돋우는데 필수 불가결한 사역이며, 일상의 깊은 곳으로 뛰어드는 것이라 말합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우리를 빚으시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한편으로는 완성될 아름다운 그릇을 상상하며 진흙 덩어리를 빚어가는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을 묵상해 봅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묵상하신 내용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1. (7장) 요시아 왕의 개혁은 유대땅에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 부흥은 유대 민족이 '다시 살아나는' 부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른 장소에서 바른 말을 했지만 그들이 믿는 것은 알맹이 없는 이미지 뿐인 종교였습니다. 당시의 인기있는 설교자인 바스훌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만을 외쳤지만, 그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숱한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군중에 휘둘리지 않고 단호하게 대응합니다.그는 분노했고 기도했고 주와 함께 달려가길 선택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강단에서 전해진 번영, 평안, 축복은 메시지는 바스훌의 메시지와 겹쳐집니다. 우리는 강단에서, 아니면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어떻게 선포해야 할까요 ?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1. (8장) 예레미야처럼 원망과 상처와 분노를 담아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나요?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의 내용을 바꿔주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2. (9장) 예레미야가 가진 “생생한 끈기와 창의적인 일관성”(171)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무언가를 시도하다 멈춘 적은 없었는지요? 꾸준함을 갖기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3. (10장) 예레미야에게 신명기가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당신에게 영향을 준 책이 있나요? 살아오면서 자의적인 해석과 오용의 사례를 목격한 적이 있는지요?

  4. (11장) 조상이 명한 규율을 250년간 지켜온 레갑 가문은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유대인들의 태도, 게으름과 나태함을 지적하는 표지가 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모습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레갑 후손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나요 ?

  5. (12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중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유배생활에서 찾았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벗고 본질적인 것,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배 생활을 당하지 않게 신실하게 주님을 믿음으로 평안한 삶이 열릴 것을 기대하고,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삶을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합니다. 현실의 신앙 생활에서 여러분은 어떤 삶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에서 바빌론 포로와 같은 유배 생활이 있었다면, 그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본질을 찾게 되었다면 나눠 주세요.

  6. (12장) ‘유배’의 경험이 있으신지요?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셨나요? 아마도 군대의 경험, 혹은 외국 여행과 같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이 있으신지요?

  7. (13장) 고독에 익숙했던 예레미야였지만 그는 친구를 필요로 했고 그들과의 우정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의 삶은 추상화된 적이 없고 이름을 가진 인격들과 관계를 맺음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인격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중요하고 필수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신자와 비신자와 인간 관계를 맺고 친구를 사귀고 있나요?

  8. (14장) 아나돗의 밭을 산 예레미야의 행동은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예레미야 생전에 그 밭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결혼도 하지 못한 예레미야였기에 자식에게 물려주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실제적이고 어리석은 행위로 보이는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소망에 근거한 의도적인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비실제적인 것을 실제적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망 안에서 용기 있게 행동하며 실제적인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9. (16장) 16장에서는 명료해보이는 이집트의 삶과는 다른 통제불가능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에 의거해서 사는 믿음의 삶이 대조됩니다. 칼 바르트가 말하듯,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이집트의 삶이 아닌 모호함 속의 믿음의 삶이 생명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모호함, 모순, 무질서, 부조리, 어순선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예레미야의 삶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